얼마전 경상도를 방문한 대통령이 이쯤에서 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아 밖을 내다보는 사진을 봤다.
경북 안동 풍천면 병산리의 병산서원 만대루다.
문뜩 옛 사진통을 뒤져 만대루 사진들을 들쳐본다.
과거 안동 하회마을을 오가는 길엔 항상 병산서원을 들리거나,
하회마을엔 들리지 않더라도 굳이 병산서원으로 발걸음이 저절로 가지는 것은
나로선 오직 만대루(晩對樓)때문이다.
서원의 누각으로선 꽤 우람하고 그 생김새와 만듬새가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이는 서원에서 내다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의 운치를 말하고
어떤이는 한국건축의 백미운운하지만
건축에 무식한 나로선 그 투박스러움이 가장 마음에 듣다.
병산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코앞에 닥치는게 만대루인데
병산서원(屛山書院) 현판이 걸린 강학당(교실)인 입교당(立敎堂)은 만대루밑을 통해 가게 되어있다.
여기를 통과하다 보면 생긴대로 짓고 있는대로 지은 만대루의 진면목이 여실히 들어나기 시작한다.
기둥은 통나무 그대로 갖다 세우고 주춧돌도 별로 다듬지 않고 생긴대로 고였다.
휘었으면 휜 그대로, 거칠면 거친 그대로 갖다 박고 세웠다.
그러면서 수백년간 한결같은 튼튼함과 균형을 유지한걸
한국건축의 백미라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수 밖에 없다.
기둥과 주춧돌은 그렇다 치고 대들보를 보자.
육중한 통나무를 생긴 그대로 다듬어 올렸다.
투박스러움의 절정앞에 세련미 운운은 설자리가 없다.
세련미를 찾는 사람들은 사방으로 둘러친 계자난간에서 위안을 얻을지 모르겠다.
육중한 대들보에 비하면 한참 정교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육중한 대들보를 천장에 가벼히 괴어놓은 것이 더한 정교함이 아닐런지.
만대루에 오르는 계단 역시 통나무 하나를 통채로 깍아 걸쳐 놓았다.
방문객들이 꼭 사진에 담아가는 걸물인데
그 투박한 아이디어가 경탄스럽다.
예전에는 신발벗고 마음대로 올라갔는데
지금은 만대루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서원에 짓는 누각들은 대체로 휴식, 연회, 강학등의 복합공간이라 한다.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인데 앞에는 높지 않은 병산(屛山)이 둘러쳐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이 마치 7폭 병풍을 보는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목을 길게 빼고 내려다 보아도 낙동강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만대루라는 명칭은 중국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翠屛宜晩對 :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만 하고
白谷會深遊 : 흰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만대루를 보았으니 병산서원 전체를 한번 둘러보자.
만대루는 병산서원 정문인 복례문(復禮門) 바로 뒤에 서있다.
만대루밑을 지나 들어서면 병산서원 강학당인 입교당이고
동서양쪽으로 수련생들의 기숙사인 동제(명성제), 서제(경의제)가 마주보고 서있다.
입교당쪽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동제, 서제
병산서원은 고려때 안동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이 세월이 지나면서
주거지역으로 변하여 번잡스러워 지자 유림들이 서당을 옮기기로 하고,
마침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류성룡에게 자문하니
병산이 가장 적지라고 권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서당 이름도 병산서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때가 1572년(선조5년)이다.
이순신과 더불어 임진왜난의 국난을 극복한 류성룡이지만
그가 세우게 한 병산서당은 정작 임난중에 불에 타버렸다.
이에 지방 유림들이 병산서당을 중건하고 "서당"을 "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아울러 1609년 류성룡이 타계하자 이 출중한 위인을 기리기 위해
서당뒤편으로 존덕사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사원철폐때도 살아남았다.
1969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만대루 전경
멀리서 바라보면 투박함은 사라지고
반듯한 균형미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