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의 묘

2017. 10. 9. 22:56 from 세월의 조각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년에 나서 1519년에 세상을 하직했으니 아득한 500년전 사람인 그대에 관해

나는 별로 아는게 없네.

조선 성리학의 정맥(正脈)을 이어 후세에 두루 추앙을 받는다지만

나는 그대의 학문에 관해 풍문으로만 들었을뿐 실제 아는게 별로 없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대를 친근히 여기는 것은

순전히 그대가 내 광교산 등산길에서 언제나 나를 마중하기 때문일세.

용인 수지구 상현동 포은대로(옛23번국도)변에서 광교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대의 묘소옆을 지나게 되어있네.

십수년간을 그대 묘소옆 "광교산 너울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그대를 보아온 탓에

나는 그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꽤 친근한 사이인듯 착각을 하게 된다네.

이곳은 그대 묘뿐아니라 한양조씨의 여러 묘들도 함께 있는데

지금은 예전에 비해 묘역이 충분하진 않지만 제법 깔끔히 가꾸어진 폭일세.



그대의 묘소로 오르는 언덕 초입에 서있는 신도비는 선조18년(1585년)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노수신(盧守愼)이 짓고,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자 역시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 이산해(李山海)가 썼다고 하네.

여기에는 그대의 생애, 업적,행장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지만

수백년 세월의 흔적으로 마모가 가볍지 않으이.



그런데 부인 한산 이씨와 합장된 그대의 묘소옆을 지날때 마다

나는 언제나 마음이 안타깝고 착잡해짐을 어찌할 수가 없다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다(憂國如憂家)"는 그대가

대역죄로 몰리어 37세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것이 안타깝고,

그대의 도학정치(道學政治)와, 임금을 성인(聖人)으로 만들려 한 이상주의가

현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무작정 이념근본주의로만 치닫은게 아닌가 착잡한단 말일세.



그대가 이곳 선영터에 뭍힐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대의 과거동문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덕이란 걸 아시는가?

그대와 양팽손은 같은해 사마시에 응시하여

그대는 진사시에서, 양공은 생원시에서 각기 장원급제한 평생의 지기 아닌가?

그대가 관직에 나아간지 불과 4년만에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전라남도 능주가

양팽손의 고향땅이었다는 것은 정말 불행중에서도 천만 다행이었네.

유베된지 겨우 한 달, 추운 섣달에 그대를 그토록 총애하던 중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때

역적의 시신은 함부로 거두지 못하고 들판에 버리게 하던 그 엄한 시대에

그대의 주검을 수습하여 마을 골짜기에 뭍었다가

이듬해 봄 용인 이곳으로 이장해준 사람이 바로 친구 양팽손이었다네.



정암, 많은 사람들이 자네를 말할때 "급진" "과격" "독선" "교만"을 들먹이네.

자네 왜 그리 성급하고 조급하게 밀어 부쳤는가?

혁명은 일거에 전광석화로 해치워야 하지만

개혁은 차근차근 끈질기게 추진해야 하는것 아닌가?

자네가 도입한  새로운 과거제도 "현량과"도

자네를 따르는 젊은 사림파들이 대거 급제하였으니 빈축을 살만하지 않은가?

게다가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웠다는 정국공신 103명중

78명의 공훈을 무자비하게 삭제케 한,

훈구파에 대한 그대의 대대적인 인적청산도

결국 몇일뒤 궁지에 몰린 심온, 남곤등 훈구파의 역습으로

그대와 신진 사림세력의 몰락을 자초한 기묘사화의 비극을 결과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안타깝고 착잡한 일이로세.




자네의 묘소에서 몇걸음 안되는 곳에 자네를 기리는 서원이 있네.

이름하여 심곡서원(深谷書院)이라 한다네.

심곡서원터는  그대가 부친(조원강)의 묘를 모시고 3년간 시묘하며

학문에 정진하던 곳이라 하네.

그대를 높이 평가한던 선조가 1605년(宣祖 38년)에 지은 것이라네.

선조는 그대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시호를 받은지 30년후에야 서원이 세워졌다네.

이곳에는 뒤늦게나마 1958년 그대의 절친 양팽손도 함께 배향되어있네.



                                                    서원 정문앞에 서니 문득 자네에게 꼭 묻고 싶은 일이 하나 떠올랐네.

임금 중종앞에서 그대가 세종대왕을 비판했다는 그 말 말일세.

그대는 "세종께서는 재(才)와 기(氣)는 영특하고 과단스러우셨으나

학문에는 다하지 못한데가 있었던듯 싶습니다"라고 하였다는데

정암, 그 말 사실인가? 그토록 교만을 떨었는가?

정치는 학문으로 하는게 아니란 걸 자네는 정녕 몰랐단 말인가?

그렇다면 스스로 학문이 깊었다고 자처한 듯한 자네에 대해

"공은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에 나아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라는

이율곡의 그대에 대한 평가는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자네는 자기만 옮다는 독선과, 끝일줄 모르는 다변(多辯)으로도 유명한데,

그대를 총애하여 고속승진을 시킨 중종도 끝내는

그대의 장광설과 지칠줄 모르는 설교에 염증을 느껴,

그대를 몰아내려 기회만 엿보던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서원 강당에는 "정암집을 읽고"라는 숙종의 어제(御製) "讀靜庵集有感"과

송시열의 "深谷書院講堂記", 서원의 중수기(重修記)등 여러개의 현판들이 걸려있다네.

위의 현판은 송시열의 "심곡서원강당기"현판일세.

그대보다는 백년도 넘께 뒤에 태어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이 강당기를 지으면서 감회가 남달랐을 걸세.

공자(孔子), 맹자(孟子)처럼 우리나라 학자중 유일하게 子자를 붙여 宋子라 했던 송시열은

어려서부터 주자,율곡과 더불어 그대를 가장 흠모하며 공부를 했다지 않는가?

그러나 정암, 그대들의 사림정치란게 도대체 무엇인가?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노론과 소론, 어지럽게 갈라져 싸운 당쟁으로

송시열은 노론에서만 宋子일뿐, 남인들은 자기집 개 이름을 "시열"이라 지었다지 않는가!

그 싸움통에 송시열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국문을 받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에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받아 마시고 이승의 삶을 마감할수 밖에 없었다네.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83세 늙은이인데 말일세.

"사색당쟁"이란 것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민족을 헐뜯기위해 만들어 낸 말이라고 하지만

오늘의 정치판을 보게나.

변함없이 정치는 없고 명분도 명분답지 않은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의 서원은 1605년(선조38년)에 세워졌으나 오랫동안 사액(賜額)을 받지 못하다가

1650년 효종원년에야 비로서 "深谷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네.

서원이 세워진지 근 50년, 그대가 사약을 마시고 운명을 달리한지 130년만의 일이구려.

아마도 그대에 대한 정치판의 평가가 그만큼 인색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대에 대한 이 나라 지식계급의 평가는 달랐지 싶네.

고종 2년(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417개서원중

대부분이 철폐되고 47개서원만 살아남았을 때

이곳 그대의 서원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그 만큼 이 서원이 갖는 뜻이 크기 때문이 아니었겠나?



그대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3년간 부친의 시묘를 하면서 학문에 정진할때

초당옆에 작은 연못을 팟다고 하더니만 그를 흉내내어 연못을 만들었나보오.



연못은 옛모습이 아닐터이지만 서원안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나무들이 우람하오.

500년, 그대와 나와의 거리이구려.

서원을 둘러볼때마다 나는 그 우람한 수목들에 압도당한다오.

인걸은 다 간데없고 우람한 나무만이 500년 세월을 말해주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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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illiria :